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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착한 컴플렉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8.28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5610
내용

   강북삼성병원] "제가 애들만 아니면 당장 저 인간하고 헤어졌죠. 애들 때문에 살아요. 애들은 그래도 엄마편이거든요. 특히 큰애가 많이 의지가 돼요. 친정에 알리면 당장 헤어지라고 난리가 나니까 주로 그냥 큰 애한테 이야기를 하고 말아요. 큰애가 잘 들어주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큰 애가 철이 좀 일찍 든 것 같아 좀 안쓰럽긴 해요.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잘 안되네요."

남편의 폭력, 학대를 참고 살면서 속이 썩을 대로 썩은 화병 환자들을 만나면 가끔 듣는 이야기이다.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고, 그런 엄마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큰 아이. 공부도 학교 생활도 모범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챙기고, 동생들까지 잔소리하며 챙기고, 엄마 일을 묵묵히 거들어주는 큰 아이. 힘든 엄마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일이다. 남편과 다투고 자리보전하고 누우면 그래도 이야기도 들어주고, 챙겨주는 큰 아이가 있어 엄마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남편 욕도 하고, 신세한탄도 하면서 어느새 아이에게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남들 다 한다는 사춘기도 우리 애는 그냥 지나가는 것 같아요. 참 고맙지 뭐예요" 그러나, 과연 고맙기만 한 일일까? 사실 세상에 착한 아이는 없고 착한 역할을 맡은 아이만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착한 아이를 자랑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힘드신 건 알겠지만 아이에게 하소연하면 나중에 큰일납니다. 절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당장 힘든 엄마 입장에서는 야속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착한 역할을 맡았기에 아니 강요 받았기에 어른이 되어서 그 후유증으로 처절하게 고통 받는 '착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가치감으로 자해,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진료실을 방문한 은지 씨(가명)도 그 중 하나였다. (아래 사례는 여러 실제 사례를 토대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혼자 있으면 버려진 것 같고, 내가 없어져버릴 것 같고, 정말 불안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데,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인사를 하고, 눈치를 보는 내 자신이 정말 싫어요. 친구들이랑 있어도 속으로는 늘 소외된 것 같고, 마음이 불편해서 몸이 아프다면서 약속을 취소할 때도 많아요. 그래도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걸 몰라요. 늘 잘 웃고 씩씩하게 구니까요. 한번은 진지하게 죽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것도 장난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그 뒤로는 얘기 안 해요."

은지 씨는 2녀 1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식당을 해서 살림을 꾸려나갔는데 부부싸움이 잦았고, 화가 나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지냈다. 하교하고 집에 갈 때마다 '또 오늘은 어떤 나쁜 일이 있을까'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매맞고 울고 있는 엄마를 위로하고, 대신 집안 일을 하느라 여느 아이들이 부리는 응석 같은 것은 부려본 적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참고 지낸 은지 씨. 친구와의 사이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참는 것이 버릇이 되어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맞추어주려고 하다 보니 사람들과 관계가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자신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어도 적절히 자기표현을 하기 힘들어 당하고 울며 지내는 날이 많았지만 속으로 삭히면서 거짓 웃음을 웃는 그녀인지라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몇몇 친한 친구들만 눈치를 채고 "너무 힘들게 참으며 살지 마라"라며 충고할 뿐.

은지 씨는 진료실에서조차도 매우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의사의 조언을 귀담아 듣고 맞장구도 잘 쳐주려 노력하는 모습의 환자였다. 안쓰러울 정도로. 하지만 늘 스스로는 자신이 겉으로만 좋은 사람인 척하며 실제로는 나쁜 사람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명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부모의 자세는 아이의 자율성과 자존감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늘 화나 있는 부모의 눈치를 살피고, 기분에 맞추어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다. 또한 아이는 양쪽 부모의 사랑을 모두 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늘 아버지의 험담을 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암묵적 요구에 부응하느라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 생겨난 양가적 감정으로 인해 자신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럴수록 처벌을 위해 자해를 하거나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패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런 '착한 아이'들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나 직장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희생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 이런 희생을 알아주지 않으면 크게 분노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착한 아이'역할을 안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착한 아이'들은 "나라도 착하게 굴지 않으면 엄마가 떠나거나 죽어버릴 것 같아서 늘 무서웠어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착한 아이가 있음으로써 부부갈등은 해결을 보지 못하고 고착화되게 된다.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 위로해주는 착한 아이가 없다면 부부는 이혼을 하든, 자신을 고쳐가든 일찌감치 해결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부부불화를 겪는 가정의 자녀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보고도 있듯이 어른들의 싸움은 어른들 선에서 끝내야 할 일인 것이다.

물론 하소연이 아닌 엄마의 힘든 상황을 설명 해주는 정도의 말은 한 두 번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정도를 넘어서 매번 아이를 대상으로 하소연을 하고, 아이에게 기대고 있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 불행을 견디고 있는 이유가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용기를 내어보자. 부부갈등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상담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전문가를 바로 찾아가는 것이 좋으며, 심리상담을 통해  볼 수도 있으니 힘을 내자. 그리고,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위로의 말을 전하자. 수고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눈치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 의견을 말하면서 편하게 살자고. 그러면 당신 속에 남아있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은 아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 최정미 임상조교수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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